공방 공사를 간신히 마친 지 3개월.
무려 1 분기가 지나가고 있지만
사실 상 공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된 지는
한 달이 간신히 된 것 같습니다.
심지어 작업을 하고 있을 뿐,
'팔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엉망진창 좌충우돌, 실수와 오류, 판단 미스에
뭔가 잘못되었는데 정확히 뭘 잘못하고 있는 건지 모르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고
그 와중에 체력은 착실히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웃음
아무튼.
오늘은 요즘 제가 적극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는 수많은 실패 중 하나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시작은 2년 전,
세상의 유행을 집안에 불어넣으시는 분,
어머니께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요즘 돈복에 비휴가 좋다고 하니 사와라.

그래서 저는 남대문에 가서 비휴를 두 쌍 사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두 쌍을 사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가게 사장님이 두 쌍씩만 판다고 하셔서 그랬던 건데...
...상업적 전술이었던 걸까요...
아무튼 어머니에게 한 쌍을 드리고
한 쌍은 제가 가졌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모자이크 오팔 비드와 합쳐 팔찌를 만들었죠.
https://opalgirin.tistory.com/170
인사동 쌈지길: 하오 아뜰리에
그동안 계속 팔찌 만들기를 실패해서 결국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인사동 쌈지길에 체험을 예약했습니다.분명 금속사로 꿰었는데도 자꾸 끊어지거나 풀려서 분해되더라고요...이래
opalgirin.tistory.com
그 팔찌를 한동안 차다가...
역시 모자이크 오팔도 오팔이라고
흠집과 손상이 계속 되어 결국 보관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 그 팔찌를 꺼내 다시 분해했습니다.
귀금속 세공을 배우면서,
공방 공사를 직접하고 물건을 배치하고 꾸미면서,
제 몸에 걸치는 장신구는 반드시
제가 직접 만든 걸 쓰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외국에서 수입한, 누군가가 만든 이 비휴는
영원한 휴식기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왁스 연습도 기초 과정을 한 바퀴 돌아 완료했기에,
왁스 조각 연습을 겸해 비휴를 깎아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비휴를 검색합니다.
상상의 동물로 동남아시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어라, 중국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수컷이 비, 암컷이 휴.
이건 기린이랑 비슷하네요.
기린도 수컷을 기, 암컷을 린이라고 하죠.
다시 비휴로 돌아와서,
비휴는 용 머리에 사자의 몸을 타고 난, 용의 일종으로
금은보화를 삼키며 항문이 없어서 그게 그대로 뱃속에 쌓인다고 합니다.
그렇게 먹은 것을 토해내 재물을 준다는 속설이 있어서
중국에서 인기가 있다고 하네요.
...돈은 일단 새는 곳을 막는 게 우선이긴 하죠...
그런 의미에서...
이 비휴는 궁디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괜찮은 건지...

그리하여 오팔기린의, 저의 비휴를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파는 물건을 만들기에 앞서,
비휴부터 만들어서 비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 공방의 상징은 기린이지만
기린은 자비로울 뿐 부를 가져다주진 않기 때문에...
저는 그림도 디자인 스케치도 배운 적이 없으므로
대뜸 왁스 토막을 깎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일단은...
그래도 용이니까 뿔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쪽 앞발을 올려 그 아래에 오팔을 두면 어떨까요.

용은 원래 돼지코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코는 돼지코로, 몸은 오동통하게...
집중해서 신나게 깎아버리는 바람에 중간에 사진 찍는 걸 잊어버렸습니다.

한 겹 한 겹 왁스를 깎아갑니다.
상상을 했기 때문에 왁스를 깎는 건지,
왁스를 깎았기 때문에 상상이 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얼추 태가 잡혔다 싶어서 눈과 콧구멍 자리를 찍어봅니다.

음...뭔가...
돼지와 코알라가 섞인 듯한...

돈복을 잔뜩 가지고 보물을 많이 먹어야 하므로
오동통한 뱃살이 포인트입니다.

조금 더 깎아갑니다.
용의 뿔은 힘의 상징이므로
덩치에 비해 다소 크고 우람하게.

...돼지와 코알라와 마네키네코가 섞인 것 같습니다.

음...
눈구멍을 뚫긴 했지만 저기에 큐빅을 박고 싶진 않습니다.
동물 모양 장식물의 눈에 번쩍이는 큐빅이라니...그런 건 제 취향이 아닙니다.
조그맣게, 까만 흑옥이나 그런 걸로 귀엽게...

궁디가 너무 각졌는데...
입체적인 구상이 부족하군요.

뒷다리와 뱃살도 확실히 구분지어 줍니다.
고양이처럼 육구도 새겨줍니다.
뒷발에도 하려고 했는데 공간이 없어서 못 했습니다.
왁스 연습할 때 중요한 게 직선, 평면, 직각을 보는 눈이고
그게 발전하면 좌우 균형과 대칭을 알아보는 눈인데
뒷발이 서로 두께와 길이가 다른 걸 보니 역시 저는 아직 멀었군요.
비휴는 응X가 없다고 했으므로
엉덩이 밑에 X자는 그리지 않습니다.

굴강한 뿔.
그래도 조금 더 깎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깎는다고 너무 힘주다가 부러질 수도 있으니 조심조심...

이 시점에서 꼬리를 제대로 상상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꼬리를 깎았는데...
매우 이상해졌습니다.

흠...뭔가 진돗개 꼬리 같기도 하고...
풍성했던 궁디가 줄어들어서 머리가 너무 커진 것 같고...

돼지코 머리와 뿔, 뱃살, 뒷발바닥까지는 좋았는데
궁디와 뿔 부분에서 상상력이 부족했습니다.

비휴 깎기 첫 시도는 실패로군요.

그간 연습한 왁스통으로 들어갑니다.
한 번 더 왁스 기초 연습 루틴을 한 바퀴 돈 후에 다시 시도해볼 겁니다.
한 네다섯 번 더 시도하면 디자인이 점점 잡히면서 성공할 수 있을 지도?

통에는 그간 연습한 왁스들이 조금 들어 있습니다.
왁스 연습으로 이 통을 다 채우는 게 목표입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배운 건 바로 소화가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작년까지는 국가의 돈으로 기초를 배웠다면
이제는 제 돈을 들여서 기초로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요즘 하는 일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그간 배운 걸 복습하며 연습을 하고,
갑자기 떠올랐거나 그간 생각해둔 아이디어를 시도하고,
계속 실패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고 있는 걸 자유자재로 만들려면,
다른 멋진 디자인들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지금의 이 실패들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앞으로 시도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체력과 정신력과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네요.
그래도 그냥 계속해서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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