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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주얼러들

저명한 주얼러들 Famous Jewellers: 찰스 루이스 티파니Charles Lewis Tiffany

by Yeonwoo8310 2025.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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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알아볼 주얼러는 찰스 루이스 티파니, 즉 오늘날의 브랜드 티파니앤코의 창립자입니다.

아직도 유명한 브랜드의 창립자라서 그런지 지난 주에 조사했던 주얼러와는 다르게 정보가 넘쳐납니다.

적당히 필요한 내용만 골라내는 데 아주 애를 먹었습니다.

생몰연도는 1812년부터 1902년이군요.

딱 90년...

아버지는 코네티컷 지역에 직물 생산 공장을 소유한 회사 사장님...부유했겠군요.

1837년에 아버지에게 천 달러를 빌려서 뉴욕으로 상경, 친구 John B. Young과 함께 문구 및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대공황 시기였지만 이 가게는 점차 유명해지며 곧 주얼리와 은제품들도 다루게 되었습니다.

1841년에는 J. L. Ellis를 세 번째 협력자로 들여서 회사 이름은 [티파니, 영 앤 엘리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Young의 누이인 해리엇(Harriet)과 결혼하여 이후 여섯 자녀를 낳았습니다.

 

1845년에는 미국 전지역에 주얼리를 판매하기 위해서 최초의 우편주문용 카탈로그를 만들었는데, 이때 표지에 쓴 게 바로 티파니의 색으로 유명한 그 민트색입니다. 통칭 "블루북"으로 불렸으며 1800년 대 말부터는 아예 브랜드 컬러로 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미국 울새 알색, 로빈스에그블루(Robin's egg blue)라고도 하며, 조사해보니 정말 새가 낳은 알색이랑 똑같습니다.

합성 아님...

 

1848년에는 아예 장신구를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해에는 프랑스의 루이 필립 1세가 퇴위했는데, 그 영향으로 프랑스의 귀족들은 망명하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보석들을 돈으로 바꾸고 싶어했고, 티파니는 기회를 보고 막대한 양의 다이아몬드를 사들였습니다. 이때 사들인 다이아몬드 중에는 마리 앙투와네트가 착용했던 것들도 있었으며, 얼마나 매물을 쓸어담았는지 다이아몬드 가격이 50% 폭락할 정도였습니다. 이에 언론에서는 티파니를 "다이아몬드의 왕"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1850년에는 파리에 지점을 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얼리업계에서 파리에 가게를 낸다는 것은 서구문화권에서 브랜드 입지가 높아졌다는 걸 상징합니다.

하이엔드 주얼리의 경우, 매장 위치 선정의 끝판왕은 프랑스 파리의 방돔 광장이고요.

물론 현재의 티파니는 당연 방돔 광장에 매장이......없네?

어라?

음...과연 방돔 광장의 위상은 높군요...

또한 티파니는 영국에서 쓰던 스털링 실버(=정은)를 미국에 도입한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순은]은 은 99.9% 이상을,

[정은], 스털링 실버는 은 92.5%에 구리 7.5%를 섞어 만든 합금을 말합니다.

[정은]이란 용어는 "법정순은"을 줄인 말로 보이며, 이 말이 만들어졌던 시대에는 "이 정도 %까지는 순은으로 쳐주겠다"는 의미였겠지만, 금속 제련 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는 그냥 은 순도 92.5%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요즘 시대에 92.5% 짜리를 "순은"이라고 팔면 사기죠. 저 어릴 때(=수십년 전 옛날)에는 "순은"이라면서 파는 장사꾼도 있긴 했습니다...

92.5%는 무른 금속인 은의 하얀 색깔을 잃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단단함을 확보할 수 있는 합금 비율입니다.

법적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시대에는 공장마다, 브랜드마다 제각기 다른 합금재료와 다른 비율을 사용하였습니다.

영국에서 은화를 통화로 쓰면서 이 비율을 법으로 정했고, 티파니도 이 비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현대에서도 쓰이고 있으며, 주조로 대량 생산한 실버 주얼리는 대개 스털링 실버, 즉 정은입니다. 

브랜드색 때문인가 굉장히 티파니다운 느낌....

 

1853년, 공동창업자이던 Young과 Ellis가 은퇴함으로써 티파니가 회사의 모든 운영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에 회사명도 티파니앤코가 되었습니다.

 

1858년에는 북미 지역과 유럽을 잇는 최초의 대서양 횡단 전신 케이블이 깔렸는데, 티파니는 시공사가 쓰고 남은 이 케이블을 구해다가 장신구 기념품을 만들었고 이게 대박이 났습니다.

이게 티파니 거였어?

 

1861년에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했는데, 티파니는 열렬한 북부 연방(Union) 지지자로 이 전쟁을 위해 검이나 메달, 기타 물자를 생산하는 데 자본을 쏟아부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아내를 위해 티파니에서 주얼리를 구매한 적도 있다는군요.

 

1867년, 파리 세계 박람회에 참가하여 속이 빈 은제품으로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미국 디자인이 외국에서 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라고 합니다.

이것도 티파니 거였어??

 

1868년에는 런던과 제네바에 지점을 열었습니다.

 

1877년에는 남아프리카 킴벌리 광산에서 역대 최대이자 최고의 옐로우 다이아몬드가 채굴되었는데 티파니는 287.42캐럿이나 되는 이 거대한 다이아몬드 원석을 샀습니다. 티파니는 이 원석을 82개 면을 가진 128.54 캐럿 쿠션컷(사각형)으로 연마했고, 이 다이아몬드는 즉시 회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티파니는 이 "티파니 다이아몬드"를 팔지 않고 세팅을 바꾸어가며 마케팅에 쓰고 있습니다.

처음 이 다이아몬드는 목걸이로 세팅했다가, 십수년이 지나서 다시 디자인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디자인이 바로 이 전설적인 버드 온 어 락 (Bird on a rock).

티파니에 입사했던 쟝 슐럼버제가 디자인한 것입니다.

쟝 슐럼버제에 대한 포스팅은 전에 한 게 있습니다.

https://opalgirin.tistory.com/267

 

저명한 주얼러들 Famous Jewellers: 쟝 슐럼버제 Jean Schlumberger

이번에 알아볼 주얼러는 쟝 슐럼버제입니다.  생몰연도는 1907년 ~ 1987년입니다.프랑스의 직물 제조를 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그림 그리길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습니다.부모님은 정규 미

opalgirin.tistory.com

 

1878년, 티파니는 파리 박람회에서 은제품과 주얼리 부문에서 상을 받고, 프랑스의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 왕실과 러시아의 차르, 당시 오스만 제국, 이란의 왕실 세공사로 인정받았습니다.

1886년에는 보석을 반지 위로 높이 들어올려서 여섯 개의 발로 고정하는 티파니 세팅이 발명되었습니다. 반지 위에 다이아몬드가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디자인 혁명은 바로 티파니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디자인이 혁명적인 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때까지 보석은 대개 반지테에 바로 붙어서 세팅되었습니다.

금을 주로 쓰는 옛날 주얼리에서는 보석이 본체에 바싹 붙어 있는데, 이는 금의 연한 물성 때문입니다. 튀어나온 건 아무래도 여기저기 부딪히기 쉽고, 돌출된 난집은 작은 충격에도 뒤틀리기 쉬웠습니다. 난발이 우그러지거나 부러져서 귀중한 보석이 툭 빠져버리면 안 되죠. 

이런 이유도 있어서 그런지 관습적인 보석 세팅 디자인 상식이 있었는데, 티파니는 여기에서 벗어나 반지테 위로 보석을 쭉 올려 세팅한 것입니다.

금속 제련과 가공 기술이 발전하여 백금을 비롯해 여러 귀금속을 갖가지 용도에 따라 다양한 물성으로 만들 수 있게 되면서 이런 구조를 해도 어지간한 충격에 세팅이 버티게 된 것도 한몫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디자인은 현실에 구현할 수 없으니까요.

이 세팅 디자인은 손에 착용했을 때 보석이 손가락 피부에 밀착한 게 아니라 손 위에 반쯤 떠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스톤 면적의 확보라는 측면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주얼리 업계에서 대부분의 기술은 스톤을 고정하는 난발이나 세팅이 보석을 가리는 면적을 최소한도로 만드는 것에 집중합니다.

반클리프앤아펠이 아예 난발이 없는 미스터리 세팅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제품을 개발하여 이름을 널리 알린 게 그 증거입니다.

빛나는 보석을 최대한으로 드러내는 것. 보석의 면적을 가리는 필요악인 난발을 최소한도로 줄이는 기술을 계속 개발해왔습니다.

백금은 금보다 단단하기 때문에 보석을 고정하는 난발이 금보다 더 가늘어질 수 있습니다. 하이 주얼리에서 백금을 많이 쓰는 이유입니다. 백금의 흰색이 다이아몬드의 광채와 잘 맞는 것도 있지요.

그런데, 티파니는 역으로 난발을 아름답게 배치하는 아이디어를 낸 겁니다.

과학 측면에서 어떤 물체를 고정할 때 필요한 점은 최소 3개가 있어야 하며, 4개가 안정적입니다. 그래야 어느 방향에서 힘이 가해지더라도 버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티파니는 아예 2개를 더 늘려서 육각형을 이루도록 난발을 배치했습니다.

난발 개수가 늘어나면서 보석이 가려지는 면적은 확실히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난발이 대칭으로 육각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기에, 보석만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보석과 난발의 조화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요.

확실히 난발의 존재감이 살아있지만 별로 거슬리지 않습니다.

1889년 파리 박람회에서 티파니 블루색을 테마색으로 하여 전시를 꾸몄습니다. 그 뒤로 팬톤 컬러 시스템은 티파니가 창립된 해를 의미하는 1837 이라는 숫자를 이 색의 이름으로 붙였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공동 경영을 했던 영과 엘리스가 은퇴한 뒤에도 혼자 남아서 티파니를 이끈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매우 정력적인 사업가로서 사망할 때까지 은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인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는 아버지 사후에 회사를 물려받았습니다.

(첫째 아들은 6세에 사망, 5째 아들은 1세에 사망...)

찰스 루이스 티파니는 주얼리 제작은 배운 적이 없는, 완전 사업계였네요.

하지만 주얼리 업계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거대합니다.

참고 사이트

https://www.tiffany.com/world-of-tiffany/heritage/charles-lewis-tiffany.html

 

Charles Lewis Tiffany | Tiffany & Co. US

The Tiffany Diamond is one of the largest and most celebrated fancy yellow diamonds in the world. The 287.42-carat rough stone was unearthed in South Africa in 1877 and acquired by Charles Lewis Tiffany a year later. Cut to 128.54 carats to enhance its bri

www.tiffany.com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Charles-Lewis-Tiffany

 

Charles Lewis Tiffany | Founder of Tiffany & Co., Luxury Retailer | Britannica

Charles Lewis Tiffany was an American jeweler who made a specialty of importing historic gems, jewelry, and artwork. He cofounded a stationery and fancy-goods store in 1837 that in 1853 became Tiffany & Co., which continues to be an iconic American luxury

www.britannica.com

https://press.tiffany.com/spokespeople/charles-lewis-tiffany/

 

Charles Lewis Tiffany - Tiffany

Behind the shimmer and renown of every Tiffany & Co. creation is a moving story...

press.tiffany.com

https://www.ebsco.com/research-starters/biography/charles-lewis-tiffany

 

Charles Lewis Tiffany | EBSCO

Charles Lewis Tiffany was a prominent American jeweler and businessman, best known for founding the luxury retail brand Tiffany & Co. Born into a family involved in the cotton industry in Connecticut, Tiffany gained early retail experience running a genera

www.ebsco.com

https://myjewelryrepair.com/2024/07/influential-jewelry-designers-charles-lewis-tiffany-co/

 

Influential Jewelry Designers: Charles Lewis Tiffany and the Birth of Tiffany & Co.

Jewelry Designers Throughout history Discover the history of Charles Lewis Tiffany, the founder of Tiffany & Co., including his early life, brand

myjewelryrepair.com

https://areaofdesign.com/charles-lewis-tiffany/#biography

 

https://areaofdesign.com/charles-lewis-tiffany/#biography

All images are copyrighted and strictly for educational and viewing purposes. Born in Connecticut in 1812, Charles Tiffany went to New York City in 1837 with his friend John B. Young. Together they opened a stationery/merchandise store and soon began offer

areaofdesign.com

https://press.tiffany.com/our-story/tiffanys-legacy-pioneer-of-american-luxury/

 

Tiffany's Legacy - Tiffany

The 1830s in New York City were a time of dynamic growth and golden opportunity...

press.tiffany.com

https://en.wikipedia.org/wiki/Charles_Lewis_Tiffany

 

Charles Lewis Tiffany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American businessman and jeweller (1812–1902) Charles Lewis Tiffany (February 15, 1812 – February 18, 1902) was an American businessman and jeweler who founded New York City's Tiffany & Co. in 1837. Known for his j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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